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지마 류조 (문단 편집) == 한국과의 관련성 == 지금은 사망한지 제법 오래돼서 인지도가 많이 낮고 사실 활동 당시에도 크게 인지도가 높은 인물은 아니었지만[* 한국 일반인들은 대부분 모르던 수준이였으나, 2000년대 드라마 제5공화국, 그리고 그에 앞서 2005년 4월 16일, KBS 미디어 포커스에서 '세지마 류조로 본 한일 극우 커넥션과 언론'이라는 제목으로 주제를 다루면서 그 실체가 대중적으로 제법 유명해졌다. 실제 파고 보니 끝도 없었다고..], 보통 한일 양국의 언론에서는 세지마 류조를 [[지한파]]로 분류하는 편이었다. 다만 여기서 '''[[지한파]]'''의 의미를 잘 알아둘 필요가 있다. 언론에서 일반적으로 설명하는 일본의 '지한파'는 우익 세력에 한정할 경우에는 [[아시아주의]]를 내걸고 한국과의 관계협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자주 거론된다. 하지만 이들의 실상을 파고보면 [[일본 제국]] 시절에 대륙 침략을 위해선 후방병참기지로 조선과 만주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던 부류들로, 2차대전 시기에는 한반도와 [[만주국]]에서 수탈과 침략에 앞장섰으며 패전 이후에는 반소반공을 내걸고 공산주의를 막는 방파제로서 한반도가 중요하다고 외치면서 한일 외교관계 복원과 일본기업의 한국 진출에 앞장선 사람들이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자신들과 이념적 색채가 유사하고 몇몇은 친분도 있는 한국의 군부독재 세력과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실제 한국현대사 학자인 [[서중석]] 명예교수도 '일본 극우세력과 한국의 군부독재, 친일 세력들은 서로가 매우 밀접하게 친했다'고 평가했다. 성급한 일반화일수도 있지만, 1930년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게 일본 군국주의 우익 세력이고, 당연히 이 시기의 친일 세력들은 그에 기생했을테고, 이때 일본사관학교에서 길러진 장교 중 상당수가 훗날 한국의 군부독재 세력으로 큰거 보면 그럴듯한 추론도 가능은 하다. 물론 이건 한국에서 쿠데타로 민간 정부를 뒤집어엎었기에 나타난 결과물일 뿐이라(애초에 그 장면 내각도 친일적 성격이 있었고, 한일 수교도 미국이 강력히 원했기에 애초에 어느 정권에서든 이뤄질 일이긴 했다), 우연의 일치인 측면도 있긴 하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까지는 대륙침략을 부르짖다가 패전 이후에는 시대가 달라졌으니 한반도 진출을 부르짖는 것이었다. 세지마 류조도 [[일본 제국]]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만주군]] [[장교]]를 했던 [[박정희]]와 교분이 있었다. 박정희가 졸업한 2년제 [[만주국육군군관학교]]는 4년제인 [[일본육군사관학교]] 시험에서 떨어진 일본인들이나 가는 곳으로 졸업 후 일본육사 편입이 가능하였고, 일부 성적이 우수한 조선인들도 만주군관학교 줄업후 일본 육사 편입이 가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만주 군관 학교 출신들은 일종의 [[콤플렉스|열등의식]]과 함께 일본 육사 출신들을 경외하는 모습도 보여줬는데 대표적으로 박정희가 국군내에서도 일본 육사 출신에 대해 제법 경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세지마도 박정희가 대통령이던 시절에 한국에 자주 와서 [[청와대]]에서 박정희와 만났다고 한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에도 이런 분위기로 인해 만주군 소위 출신인 박정희와 만주국 상공대신이었던 기시 노부스케로 대표되는 양국의 소위 만주국 인맥들이 큰 역할을 하였다. 물론 말단 소위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만주국 당시 박정희는 실권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긴 했다. 하여튼 관동군 참모 출신인 세지마 류조도 이런 만주국 인맥의 일원으로 한일양국의 우익세력을 잇는 밀사 역할을 하였다.[* 물론 후술되어있듯 세지마 류조가 뻥카가 심한 인물이었다는건 감안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세지마 류조는 이토추상사 회장으로 한국시장 진출을 위해서 한국 기업인들과 만나면서 친분을 쌓았다. 예를 들어 재일교포 출신인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과는 친구 사이로 지냈고[* 신격호는 처가를 통해서 일본의 권력층들과 인맥을 쌓았다.], 박정희의 측근인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과도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과도 어느정도 친분을 쌓아 "보통 자기를 만나면 누구던 돈달라는 이야기부터 하는데, 사업 이야기 안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이 회장이 훗날 회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세지마 류조의 한국내 인맥을 활용해서 이토추 상사는 1기 서울지하철 공사, 포항제철 장비 납품 등 상당한 이권을 챙길 수 있었다.[* 사실 이토추 상사에서 세지마 류조의 역할은 한/일 양국 정치권과의 인맥에 기반한 [[로비스트]]였다. --그러니 친분쌓기에 혈안이..-- 이때문에 일본 기업문화에서 실질적인 경영자라 할 수 있는 사장에는 오르지 못하고 대신 얼굴마담 격인 회장으로 가게 된 것이다.] 박정희가 사망한 다음에는 육사 11기 출신인 [[권익현]] 삼성고문이 다리를 놔줘서 세지마 류조는 전두환, 노태우의 [[하나회|신군부]] 세력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특히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기도 전에 한국을 방문해서 한국의 국가발전과 체제안정을 위해선 [[올림픽]]이나 [[엑스포|만국박람회]] 같은 [[3S정책|국가적 거대행사를 유치해 국민들의 관심을 돌려보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이것은 MBC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에서도 잠깐 나온 바 있다.[* [[이일웅]]이 류조 역으로 출연했다.][* 일본도 1960년대엔 [[전공투]]처럼 체체변혁을 내세운 극좌 성향의 학생운동, 노동운동이 활발했었다. 그러나 [[1964 도쿄 올림픽]], [[1970 오사카 엑스포|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의 성공과 [[자유민주당(일본)|자민당]] 정권의 복지 확대, 토목 공사 정책 등으로 [[중산층]]이 형성되고, 한편으로는 좌파가 급진적인 성격을 띄게 되면서 학생운동, 노동운동 모두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세지마 류조가 신군부에 올림픽 유치를 제안한 것은 이러한 일본의 경험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도 이후 3저호황에 따른 경제활황 등으로 중산층이 형성되자 체제를 뒤엎자는 급진적인 학생운동은 퇴조하고 체제내의 개혁을 요구하는 시민운동이 성장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전두환은 6월 항쟁 맞고 몰락한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은 물론 이 조언 하나 들었다고 추진한 것은 아니겠지만, 국격 상승 효과도 있으니 [[1988 서울 올림픽/유치 과정|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에 사활을 걸고 결국 성공하게 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유치경쟁상대로 맞붙은 상대가 다른 곳도 아니고 '''일본 [[나고야]]'''였다. --팀킬-- 다만 당시 나고야는 [[일본사회당]]의 지지세가 강력하던 곳으로 혁신계 인사가 시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골수우익 성향인 세지마 류조는 별 감흥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성 주장도 있다.] 전두환과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한일정상회담도 세지마 류조가 물밑에서 어느정도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런 막후공작으로 나카소네는 1983년 현직 일본 총리로는 최초로 한국을 공식 방문했다. 나카소네는 방한 기간 동안 [[노신영]] 외무부장관과의 밀담을 통해 40억 [[미국 달러|달러]]의 [[차관]]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으로 집권 초기 전두환 정권에게 활력을 열어줬다. 당시 [[전두환]] 정권이 내세웠던 논리는 소위 안보경협론이었다. 한국은 소련-북한의 공산권을 막고 있는 방파제 역할을 떠맡으면서 국가예산의 1/3을 국방비로 지출하는 등 허덕이고 있는데, 정작 안보혜택을 보고 있는 경제대국 일본은 아무런 기여도 없이[* 실제 이런 국방비 억제가 일본 경제 회복에 도움이 된건 사실이다.] 무임승차하고 있다. 그러니 '아무 조건 없이 안보부담금 100억 달러를 내놓으라'는 요구였다. 경제가 엉망이던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도 일본이 한국의 안보에 기여해야 한다면서 이 주장에 공감했지만, 온건파였던 일본의 [[스즈키 젠코]] 총리는 안보경협론은 [[평화헌법]], 전수방위 원칙 위반이라면서 단호하게 거절한다. 전두환 정권은 100억 -> 60억 -> 40억 달러 순으로 계속 액수를 내리면서 어떻게든 차관을 얻을려고 매달렸지만, 재정건전화를 목표로 하고 있던 스즈키 정권은 요지부동이었다. 하지만 1982년 말 스즈키가 물러나고 강경우익 성향의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일본 총리로 취임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고, 바로 이때 양국의 우익 세력을 막후에서 연결하는 세지마 류조가 물밑 협상을 진행해서 결국 5년간 차관 40억달러 지원이 결정된다. 하지만 자민당 정권은 공식적으로는 안보부담금이라는 논리는 거부하고, 단지 우호국을 위한 [[ODA]] 지원이라고 포장한다. 그리고 1984년부터 1989년까지 들어온 일본 차관 40억 달러는 [[사회간접자본|SOC]] 투자 등에 쓰이면서 한국경제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MBC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에서는 노신영과 류조의 밀땅을 다루면서 노신영의 뻔뻔한 정도의 협상 요구에 세지마가 놀라 "겉은 잘 길들여진 [[말(동물)|말]]인데 속은 [[사자]]. 한번 붙잡은 먹이는 놓치지 않겠다."라면서 전두환에게 극찬하는 장면도 나온다. 헌데 당시 거품이 빠지기 직전 절정으로 치닫던 일본 경제를 생각하면 사실 저 돈도 일본 입장에선 생각보다 큰 돈은 아니었다. 애초에 무상이 아닌 '''빌려주는''' 차관이기도 하고.] 1987년 동해상에 표류하다가 일본 해상보안청에 나포된 탈북자 [[김만철]] 일가의 행선지를 둘러싸고 일본-한국-북한간의 외교전이 벌어졌을 때도 한일 정부 사이에서 막후협상에 [[http://www.yonhapnews.co.kr/special/2011/11/05/1438010000AKR20111105053700043.HTML|관여]]했고, [[1990년]] [[3당 합당]] 당시에도 [[55년 체제|일본 사례]]를 들어 막후 조언을 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기방패|당시 일본의 보수우익들은 한국이 공산세력을 막아주는 최우선 방파제 역할을 해야 일본이 안정된다고 생각했기에]], 한국에 강력한 반공우익 그러나 자신들이 컨트롤 할 수 있는 친일 성향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세지마 류조는 어디까지나 이런 관점에서 한국 정치권에 이런 저런 조언을 한 것이다. 게다가 원래 일본의 보수우익은 어디까지나 아시아의 보스는 당연히 일본이고 한국과 동남아는 일본이 거쳐온 길을 배우면서 따라오는 동생들로 깔보는 서열식 사고방식[* 아카마쓰 가나메(赤松要)의 ‘안행형태론(雁行形態論·Flying Geese Model)’으로 보통 국내언론에선 '기러기 이론', '기러기 편대 이론'으로 쓴다. 보통 기러기떼가 장거리 이동을 할때는 최선두에 선 두목을 따라서 V자 대형으로 비행을 하는데, 산업의 발전이 이런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이론이다. 즉, 아시아경제의 발전은 최선두인 일본을 따라서 그 뒤로 한국, 대만, 홍콩, 태국이 따라오는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게 1990년대 초반까지는 어느 정도 들어맞았지만, 그 뒤론 완전히 달라지는데(일본 거품경제 붕괴, 중국의 부상, 한국 신산업 성공 등) 일본의 우익 세력은 아직도 옛날 기러기 이론에 빠져 있어서 현실과 부조화를 일으키면서 [[혐한]]으로 진화하게 된다는 것이다.]이 확고했다.[* 이게 어느 정도였냐 하면, 1962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당시 일본 자민당 부총재 [[오노 반보쿠]] 의원은 기자들과의 공개인터뷰에서 "박정희와 자신은 부자지간 같은 사이라면서 아들의 경사를 보러 가게 돼서 기쁘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할 정도였다. 설사 오노 반보쿠가 실제로 박정희와 친분이 있었다 한들, 일국의 대통령에 대해 이런 식으로 공개발언하는건 상대를 무시하는 외교적 결례이다. 헌데 웃긴건 이 발언에 당시 한국의 야당들은 크게 반발했지만, 박정희와 집권 민주공화당은 오히려 침묵했고, 일본에선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만큼 일본 정치권에선 한국을 자신들의 아래로 깔보는 인식이 보편적이었다.] 이런 자기의 한국내 인맥을 이용해서 한국 시장에 진출한 일본 경쟁사들을 물먹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이 포항종합제철 1기 건설에서 [[미쓰비시 그룹|미츠비시]] 상사에게 발주가 예정되어 있던 장비를 박정희와의 안면을 이용해서 [[정경유착|이토츄 상사로 바꿔버린 것]]. 여담으로 이런 일화를 보면 애초에 한일협정으로 일본이 낸 금액이 결코 아쉬울게 없는게, 이렇게 국교가 성사되자 실제 전범 기업을 포함한 많은 일본 기업들이 한국에 이런저런 통로로 진출했고, 그 덕에 지금와서 보면 불공정 소리까지 나오는 유리한 사업 계약 등으로[* 서울 지하철 사업도 이런 사례 중 하나였다.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861188|'원조' 둔갑 8억달러 추적해보니…그 뒤엔 '전범기업']].] 한국 시장에 뿌리내렸다. 거기에다가 21세기 이후로 한국 전자업체들이나 자동차 회사 등이 일본 전자업체나 기타 업체들을 따라잡으며 갑을관계가 뒤집혀졌음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일본기업들에게 하청을 맡기는 경우가 많았던지라 현재까지도 한국이 일본에게 경상수지 적자를 보게 하는 요인이 된 것을 보면 결코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물론 2019년 일본은 혐한 감정에 치우쳐 이런 산업 구조를 스스로 날려버리는 짓도 하게 되는데, 이런 [[한일 무역 분쟁]] 정국 당시엔 이토추 상사가 관할하는 [[데상트]]가 국내 [[불매운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물론 데상트 입장에선 조금 억울한 점도 있는게, 원래 창업가는 따로 있었는데, 이토추 상사가 통수로(...) 경영권을 뺐는데 성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